풍경 , 기다리는
Landscape, Waiting
행복한 얇은 천에 염료 120x70 2024
그럴듯한 작품제목을 생각하다가
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을 알아보게 되었어
그랬더니
딱딱하게 굳어져 풀어지지 않던 생각이 갑자기 녹는 거 같았어
별거 아니던데
난 그저 너무 좋아서 라든가, 내 눈에 이뻐서, 즐겁고 기뻐서
그 시간을 온전히 누렸을 뿐이더라고
길을 걷다가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 너무 이뻐 보고 또 보는 것처럼
내 앞에 있는 풍경을 보고 또 보고 했을 뿐이더라고
사랑하는 사람처럼
기쁘고 즐거운, 행복한 시간, 눈부시고 찬란한, 설렌,
그런 마음 뿐이었더라구
거기엔 거창한 것도 전해야 하는 이슈도 없었어
내가 진짜 나와 만나는 그 한순간일 뿐이었더라구
가리고 있던 게 많은 내가 그것들을 다 벗어버리고
홀가분히 내가 되는 순간
그래서 행복했더라구
남은숙


풍경과 나
남은숙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작가가 2020년 양평군 지평면의 한 마을로 삶의 터를 옮긴 이후 그린 작품 중 48점을 소개한다.
작가의 새로운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들이 가진 공통 주제는 풍경이며, 그 풍경은 다름이 아니라 작가의 작업실 창문 밖으로
보이거나, 창문에 내려진 블라인드에 투영된 풍경을 말한다. 이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점은 움직이지 않는다.
고정된 의자에 앉아 응시할 뿐이다. 움직이는 건 창 밖의 세계이며, 그 세계는 봄, 여름, 가을, 겨울, 끊임없이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. 이 변화무쌍한 세계 앞에 작가는 반복되는 기다림을 감내한다. 면천에 물을 바르고 기다린다.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. 붓을 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작업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그 기다림의 시간은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.
이 그1614림들은 어쩌면 그렇게 축적된 시간이 그린 결과물일지도 모른다. 이 결과물은 시각적으로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시각적 경험을 관1614람자에게 선사한다. 이건 앞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뒤에도 뭔가 있는 것 같으나, 마치 수증기나 안개처럼 가까이 가보면 그 시각적 존재가 사라져버리는, 혹은 스쳐 지나가는 효과와 비근하다. 이 효과를 재현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재료가 앞서 언급한 면천이다. 물감은 천의 조직에 따라 더 번지기도 하고, 덜 번지기도 한다. 작가는 이 물성이 가진 번짐의 묘를 이용해 실험과 탐색을 거듭한다. 그 탐색은 결국 작가를 시각적 불확실성이란 영역으로 이끈다. 이번 전시를 보는 관람자의 몫은 바로 이걸 체험해 보는 것이다. 마찬가지로, 거칠고 촘촘한 정도가 다른 천을 여러 겹 써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 작가의 시도도 눈 여겨 볼 부분이다. 또한, 그림의 구도에서 자주 보이는 불안정적인 요소도 이미 의도된 시각적 불확실성의 일환으로 읽힌다. 이건 예전의 작품과 구별되는 작가의 새로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고,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그만큼 더 선명해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. 이번 그림들을 여러 그룹으로 편성한 것도 매우 바람직한 시도다. 같은 대상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일정한 이미지로 고착화되는 걸 피하려 했다. 즉, 그 중 어느 하나도 정체된 객체가 아니라 서로 간의 미묘한 관계를 통해 각자의 존재감이 성립된다는 뜻이다. 이건 이미지 메이킹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도전과 궁극적인 해체작업과 괘를 같이 한다. 여기서 흥미로운 건 색의 역할이다. 색과 색 사이의 은근한 대화는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를 완화시켜주는데, 아이러니하게도 색의 강도가 엷으면 엷을수록 그룹으로서 전체 존재감은 더욱 강해지는 걸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. 남은숙 작가는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그림이 흩어진다고 했다. 창밖에 보이는 동네 앞산이 그리 특별한 풍경은 아니라면서 정작 자신이 집착한 대상은 창 밖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일지도 모른다는 운을 떼기도 했다. 그러니까 마음의 풍경을 그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. 하지만 이 풍경은 마음 속에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와 환경에 위치한 주체가 그린 풍경이다. 그 마음의 풍경이란 이미 자신의 마음과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하늘이 서로 깊이 연결된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. 따라서 작가가 그린 풍경은 그 땅에 사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것이며, 자신이 그 땅의 가디언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. 나는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가 남은숙 작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. 풍경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소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.
2025년 2월 28일, 여주 워터디어힐에서 홍진휘